사랑의 기술 Ⅱ

집에 돌아와 TV를 켜면 케이블 채널 어딘가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나오곤 했다. 갈색 머리의 장난꾸러기 동생이 언니의 방문을 두드릴 때 마침 나는 맥주를 한 모금 삼키던 참이었다. 눈사람을 만들자는 소녀가 지나치게 활달해서 미래의 딸에 관해 잠시 걱정하다가, 디즈니를 보기엔 내가 조금 나이를 먹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불면 때문에 종종 병원에 가는데 아마 내 주치의라면 언니는 불안증이 동생은 과잉 행동 장애가 있네요, 라고 말하며 알프람과 페니드를 처방해 주었을 것이다. 안나는 마법에 걸려 심장이 서서히 얼어 붙고 있었고 ‘진정한 사랑의 동작 act of true love’을 배우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맥주를 세 개 째 뜯자 다음 화가 방영되었다. 초록색 옷을 입은 꼬마가 개에게 물려 그림자를 잃어버렸다. 푸른 눈의 소녀는 그림자를 꿰매 주다 금세 사랑에 빠졌다. 나는 그들이 언제 섹스할지 궁금했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어울릴 법한 질문은 아니었다. 웬디는 피터 팬을, 후크 선장은 웬디를 마음에 들어 했다. 후크는 웬디를 위해 드레이프가 잡힌 셔츠를 입은 채 피아노를 연주했고 곧 피터 팬과 후크 선장의 결투가 시작됐다. 암녹색 강물 밑에서 악어가 호시탐탐 그를 노리고 있었다.

짙은 녹색으로 서울을 휘감은 한강을 지날 때면 나는 몇 가지 소문들을 떠올렸다. 이 강둑에도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악어가 살 것이다. 강물에 비친 달이 잘 연마된 호박처럼 반짝였고 수평선과 가까울 수록 그것은 점점 크고 불길해졌다. 뒷면에 있는 것들. 천체 뒤로, 수면의 아래로, 의식을 회전시키는 불균질한 힘. 바깥으로 도드라진 정점을 파먹고 음의 숫자로 자라나는 것들. 이 세계엔 뒷면에 관한 들뜬 소문들이 있고 나는 그런 종류의 소문을 즐겨 모으는 이들을 안다. 그들이 내게 건넨 이야기 중엔 침묵 속에 비극을 관찰하는 식물들의 정원이나 나무에 제 몸을 부비며 즐거움을 느낀다는 소녀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그들은 세계 끝에 생겨난 구멍과 그 구멍에서 분출하는 물줄기를, 또 다른 어떤 구멍을 황금빛으로 메운 영원한 상처를 보았다고도 했다.
그러나 무성한 증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뒷면에서 다른 뒷면을 보았다는 목격담이다. 이 모순적인 이야기에 의하면 정원의 식물들은 자기애와 자기부정을 함께 먹고 자란 양귀비들이며 그 뿌리의 동맹은 견고한 정원 생태계의 숨은 포식자라는 것이다. 소녀가 이끌린 강렬한 낯섦은 단지 나무가 아주 늙었기 때문이고 숲에선 모두가 나이를 천천히 먹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의 끝에는 구멍이 있는데 세계에는 아직 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원한 상처는 영원 속에서 짧게 입을 벌린다는 것이다…
이 이상한 증언의 목록은 세계의 연산과정에 잘못 비집고 든, 현실과 불화하는 뭉개진 추상 같지 않은가? 혹은 낮은 해상도로 묘사된 세계 내부에 유일하게 선명히 새겨진 네모난 모자이크 자국 같지는 않은가? 깊고, 짙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유기물 집합체 같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문에 따르면 후크는 원래 피터 팬의 동료였다. 스스로 나이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그는 무리에서 도망쳐 해적단을 차렸다. 그때 후크는 악어에게 한 쪽 손을 뜯어 먹히는 바람에 시계 소리에 공황을 느끼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 해적선에는 쫓겨난 어른들이 모여 매일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숙취에 시달렸다. 다행스럽게 적어도 웬디에게는 두 가지 선택에 대한 기회가 주어졌다. 네버랜드라는 밀실과 하나가 되어 일종의 코마에 빠지거나 흔들리는 배 위에서 고무장화를 신고 잠드는 어른이 되거나.
어떤 예민한 이들은 세계의 뒷면에서 사랑의 가능성과 그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본다. 아마도 이것은 모순이 가진 힘일 테다. 모순은 모든 소통과 교환의 작용을 중단시키고 열병처럼 전염된다. 그것은 불이행과 불연속으로 선고된다. 그래서 소문은 진실을 담고 있을 수록 불투명하다. 의미가 다음으로, 다음으로 지연되는 세계에서 바깥을 향한 도약은 언제나 실패하는 몸짓이다. 어떤 동작은 시시한 춤과 비슷할 것이다. 그 동작들은 필연적으로 도착이며 도상에 관한 편집증을 유발한다. 이때 세계를 이루는 도상은 (흔한 강박의 증상이 그렇듯) 어떤 상상과 비밀리에 연결되어 (고작) 우연히 명중하거나 우연히 빗나간다. 그것은 마치 상처가 아문 후 표면 위에 남은 딱지 같다.
웬디가 해적 무리에 가담해 ‘피투성이 손의 질 Red-handed Jill’이 되기로 결정하자 후크와 피터 팬의 마지막 결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다음 회에서도 그 다음 회에서도 결투는 처음처럼 반복될 것이 분명하다.

지금 나는 어느 그림 앞에 있다. 깊고, 짙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복잡한 유기물 집합체 같고 살아 있는 듯한. 이 그림은 몇 가지 중요한 관습들을 이용하고 있지만 그 선후 관계는 미묘하다. 이 그림은 폐소적임에도 여러 신을 섬기는 방탕한 유적 같다. 이 그림은 어딘가 어린 아이 같은 면이 있다. 나는 그림 앞에서 생각한다. 그림에도 뼈가 있다면 이 그림은 부러져 있다고.**
집에 돌아와 TV를 켜니 옴니버스 형식으로 짧게 각색된 디즈니 단편선이 나오고 있었다. 이 채널의 애청자는 아이들이지만 사실 디즈니의 라이센스는 나보다 훨씬 오래 살고 있다. 바지를 입지 않은 곰이 나타났고 나는 그점이 꽤 부러웠다. 푸우는 피해망상과 신경쇠약의 징후가 명백한 친구들과 너무 많은 음식을 먹어 치우다 파티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화면 가득 황금색 꿀이 쏟아졌다. 나는 갈증을 느껴 더 많은 맥주를 들이켰다. 앞면에서 우리는 모두 어딘가 앓고 있다. 우리는 간신히 정치적으로 우리를 표상하며 깜빡인다. 비상등을 켠 차처럼. 아이들은 그것을 알까. 엘사의 드레스를 탐내는 아이들은 사랑을 향해 온몸을 던지는 중일까. 나는 TV를 끄고 사랑의 기술에 관해 잠시 생각한다.

* 온다 리쿠, 권영주 번역, 『달의 뒷면』, 비채, 2012
**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밤과 / 골수들을, 내 생각은 이것 뿐 / 생각에 뼈라는 게 있다면 내 / 생각은 부러져 있다”, 송승언, 「—」, 『사랑과 교육』, 문학과 지성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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