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라 나는 용서되지 않는 얼룩”: 장파의 ‘페미니스트 회화 하기doing feminist painting’에 대한 소고

“라라라 나는 용서되지 않는 얼룩”*
: 장파의 ‘페미니스트 회화 하기doing feminist painting’에 대한 소고

0.
작가 장파는 “페미니스트 미술가”라는 타이틀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그간 자신의 미술실천을 페미니즘의 언어로서 망설임 없이 설명해왔으며, ‘여성’이라는 약호를 수없이 재현했다. 그는 또한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별 경계와 당사자주의에는 비판적 거리를 두면서, 균질한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소수자들의 개별적 경험들과 교차하는 페미니즘의 인식론에 기거하는 것 같다. 작가는, 자신의 장애인 형제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장애인 가족이 겪어야만 하는 부당한 일상의 억압 및 피해의 경험이 그의 페미니스트 입장을 보다 복잡하게 만든다. 그가 ‘장애인 가족으로 산다’라는, 남들과 조금은 다른 상태가 실은, 소위 “강남 거주 중산층, 서울대 출신 엘리트, 이성애자 기혼 여성”이라는 계급적 특권을 성찰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사유의 해방을 이끌었을 것이라 고백했을 때, 그러니까 그가 장애인 가족의 불안정한 생애서사를 조금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전할 때, 나는 그것을 서술하는 그의 태도나 어투 등이 매우 흥미롭다고 느꼈다. 그것들이 무례할 정도로 타인의 삶을 궁금해 하거나 소비하는 많은 이들에게 ‘개인적’이고 ‘특수한’ 고통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한 ‘재현형식’을 오랫동안 숙고해 정교화한 결과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사자/피해자주의를 강조하는, 고통에의 긴박한 연대 요청, 혹은 ‘분노’라는 정동의 말하기가 아닌, 담백하고 담대한 말하기. 그것을 특권화하거나 사소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발언의 정치성을 탈각시키지 않으려는 ‘분명한 말하기’에의 의지. 재현예술가로서 그의 ‘그리기’의 근간을 붙드는 어떤 회화적 욕구와 그 형식에 대해서도 한층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간 장파가 생산해낸 대부분의 회화 표면은 다소 빠르고 괴팍한 붓질과 해체적인 형태감, 자극적인 색채를 농밀하게 붙들고 있다. 대개 여성의 생물학적 신체를 그려낸 것이 분명하지만 무절제한 쾌락에 가까운 선과 획으로 조형한, 과격하게 일그러지고 기괴해져가는 형상, 발광물질에 준하는 현란한 색채에, 그 형상이 융해하며 들끓는 기운들은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라는, 대상에 대한 질문을 종종 주저하게 만든다. 여하튼 여성신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전통회화가 여성신체를 판단해온 통념적 미학과는 꽤 거리가 있는 탓에 장파의 회화는 자주 ‘반근대적’, ‘비이성적’, ‘여성적’, ’저항적’, ‘페미니즘적’ 등의 비평적 수식을 유도한다. 적어도 미술아카데미를 통해 학습하고 동의한 현대미술의 어법을 따르자면 그렇다. 한편, 꼼꼼히 분류-정리된 그의 웹페이지와*, ‘비체abject 이론’에 천착해 자기 작품의 존재론을 논증하는 석사학위 논문, 그리고 소셜미디어 등에 의도적으로 빈번히 노출하는 정연한 논리의 ‘작업노트’ 등은 작품의 내부에 가해지는 외부적 해석의 언어 그 이상을 욕망하는 작가의 이성적이고 아카데믹한, 또는 종종 관료적인 면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작업의 내・외부를 오가는 장파의 작업태도를 이렇게 가정해본다. 관습적 조형언어를 잘 학습하였으나 그것을 모른 척하는, 그 의식적인 침묵과 외면으로 획득 가능한 저항의 정치학을 이미 계산한, 나아가 그 정치학의 올바름을 과시적으로 소비하지 않으려는 ‘비틀기의 비틀기’를 도정함으로써 조직되는 태도. 그렇다면 장파의 작업 전반을 더 의미 있게 여행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작업의 내부와 외부 그 어디쯤의 경계에서, 그러니까 장파가 생산해내는 ‘작품’ 그 자체나, 혹은 ‘작품 바깥으로의 의미작용’ 사이를 예리하게 금 긋는 대신, 그 둘의 교차와 길항의 관계를 더듬어 질문해야 할 것 같다. 이 글은 장파의 작업을 명백히 페미니스트 방법론을 통해 살피고자 하지만, 페미니스트 미술을 단순화하는 일부 유형화된 관점은 경계하고 싶다. 나아가 장파의 회화에 ‘페미니스트 회화 하기’라는 최소한의 인식론적 구별 짓기를 경유해 접근하겠지만, 그것이 보편의 현대적 미술행위들과 어떻게 교호하는지를 또한 염두에 둔다.

1.
서구 제2물결 페미니스트 미술사의 방법론을 제출한 로지카 파커와 그리젤다 폴록의 저서는 『여성 거장들: 여성, 미술, 이데올로기』(1980)*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여성 거장들”의 원어는 “Old Mistresses”인데, 이는 “(남성) 거장”을 뜻하는 “Old Master”의 여성형 명사이지만,실은 등치되는 단어가 아니다. ‘Old Mistresses’는 ‘거장’은커녕, 주로 “늙은 애인/정부”라는 성애적 의미로 통용된다. 1972년 미국의 월터 아트 갤러리(Walters Arts Gallery)에서 열린, 과거의 여성화가들을 조명하는, 동명의 역설적인 전시제목을 자신들의 책 제목으로 빌려온 파커와 폴록은 ‘여성’에 대해 완벽하게 침묵하는 근대미술사를 비판하는 동시에 ‘여성미술가’가 존재해온 제도 바깥의 독자적인 실천과 방법론을 쟁점화한다. 이들의 연구는 ‘여성미술가’의 존재 자체를 입증하는 데에 급급했던 1970년대 제1물결 페미니즘 미술사가 완전히 간과한 주류 이데올로기의 효과를 명민하게 파악해낸다. 페미니스트 방법론이 ‘미술사’라는 분과학문의 문제점을 어떻게 공격하고 급진적으로 해체해왔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파커와 폴록의 이 연구는 무려 40여 년의 시차를 넘어 2019년의 한국 미술현장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관점을 제공한다. 두 저자는 이전까지 페미니즘 미술이 ‘여성의 가시화’와 ‘성차별 철폐’라는, 여성해방운동의 산물로서의 단일한 ‘사회학적’ 의제를 미술에 적용하고자 한 노력을 넘어, 당대 불/승인된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문제시하며 성별과 섹슈얼리티가 교차하는 다양한 범주의 배제와 타자화에 맞서는 관점을 미술사에 제공한다.

“거장이 있지만 ‘여성’ 거장은 없”음을 시사하는 이 ‘Old Mistress’라는 단어가 상징하듯, 이들의 연구는 단지 ‘미술가’가 아니라 ‘여성미술가’의 존재를 주장하는 일이 처한 구조적 문제를 분석한다.만약 어떤 여성이 ‘미술가’라는 직업에서 배제되지 않고, ‘여성미술가’로 인정된다 한들, 언제나 이 구별 짓기는 “여성적”이라는 형용어에 포획되기 쉽다. 이때, “여성적”이라는 형용어는 감정적이거나 불안정하고 창의적이지 않으며 미성숙함 등을 이르는 말로, 모든 폄훼의 표현을 모아둔 쓰레기통의 구실을 했다. 따라서 미술가에게 “여성적”이라는 특징은 열등함의 원인으로서의 성차, 즉 여성이기 때문에 열등한 예술가일 수밖에 없다는 차별의 논리를 뒷받침 하는 데에 이용된다. 보편으로서의 ‘남성’의 미술, 즉 남성미술가가 의미를 찾고 그것의 지배적 효과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대립물이 필요하기에, ‘여성적’이라는 형용어는 한없이 열등한 것으로 사용되어야만 했던 역사가 바로 ‘미술사’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성미술이 존재해야 하는 맥락과 그 방식은 언제나 역설적이며, 오해와 곤경을 야기한다. ‘여성’에 대한 배제에 저항하기 위해 여성미술가는 양성간의 차이 없는 동등함을 주장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차별의 ‘구조’를 폭로하고 저항하기 위해서 여성들은 역설적으로 ‘여성’이라는 ‘차이’를 포기할 수 없다.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조앤 스콧이 탁월하게 분석했듯, 따라서 페미니즘은 오직 ‘역설paradox’만을 말한다. 스콧은 이러한 역설이야말로 “페미니즘에 정치적 힘을 불어넣었”다고 주장하면서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시민권 투쟁을 분석한다.* 그는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이 이 역설을 인지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의 이름으로 제시되고 법을 통해 부여된 젠더 정의의 모순, 그리고 그 정의 안에서 생략된 바를 드러냈”다고 보았다.* 비슷한 견지에서, “여성미술” 역시 성별의 무조건적인 가시화나, (성차적으로) 여성적인 ‘작품’을 감별하는 방식만으로는 불가능한, 기존 제도와 개념이 작동하게 되는 ‘구조’를 보다 확장적인 논쟁과 재해석, 재구성 등의 복잡성을 경유해 인지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의 기획이 ‘미술가’ 대신 ‘여성미술가’라는 차별화된 영역을 제안했을 때, 여성이 귀속되는 곳이 ‘미술가’라는 지위가 아니라 ‘미술가’의 영원한 타자로서의 ‘여성미술가’일 뿐이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물론 현재의 페미니즘은 이 모든 구조적 모순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효과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저항하고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페미니즘 미술’로 호명되는 재현물들이 너무 쉽게 스테레오타입화되고 영토화되는 경향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우리는 반성 없는 역설의 정치를 쉬이 내면화해 버린 것은 아닐까. 여성적 스테레오타입이 남성적 담론의 산물임을 밝혀온 지난한 페미니스트 여정을 통해 학습한 ‘재현representation’의 가능성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장파의 작업은 일견 페미니즘이라는 역설에 갇혀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혹은 이 역설을 더욱 정치적인 것으로 수용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남성적 시각체계에 매몰된 ‘미적’ 육체를 끄집어내어, 여성의 욕망과 쾌락을 촉각하는 ‘진짜’ 자기 육체를 지나, 상징계로부터 미끄러져 탈락된 비천하고 오염된 ‘기호’로서의 육체를 향하는 장파의 회화 속 여성신체들은 페미니스트 재현이 지배적 권력의 체제 바깥에서 주체적이고 역사적인 미학을 다시 조직하는 간절하고 긴급한 과정이며 실천임을 증거한다. 그가 그려내는 대상, 혹은 구성된 화폭, 또는 세계를 단지 그림의 소재나 도상으로만 회화 내부에 머무르게 하기보다, 그것이 페미니스트로서의 ‘화가-되기’, ‘실천으로서의 회화하기’를 비추는 거울임을, 이미 성취한 목표로서의 형상이 아니라 부단히 무언가로 되어가고 변해가는 수행 중의 신체임을 이해할 때 장파 회화의 표면은 더 유연해진다. 시인 김혜순은 그가 이제껏 써온, 온갖 비천한 것들과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시가 “쓰기”로서의 시가 아니라 “하기”로서의 시였으며, 바로 이 “시하기”를 “여자짐승아시아하기”*라 이른다. 또한 그는 “나이면서 나와 다른 것, 나 아닌 것, 낮은 것, 분열된 것, 작은 사람들을 향해가는 하기의 작용”*이 페미니스트 재현임을 주장하며, “도착이 가능한 어느 세계가 아니라 ‘하기’로써 작동하는 생성의 세계”*라는 수행적 페미니즘을 요청한다. 장파의 ‘페미니스트 회화하기’란, 김혜순의 “여자짐승아시아하기”만큼이나 멈추지 않는 이동과 생성을 체현한다.

2.
2015년 개인전에서 <레이디 엑스 시리즈Lady-X Series>를 발표한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장파의 작가로서의 커리어는 뒤이어 <플루이드 네온 시리즈Fluid Neon Series>와 <어리석음 시리즈Stupidity Series>, 그리고 2018년, 두산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잔혹한 피부Brutal Skin』를 가득 채우던 여러 판형의 회화와 드로잉, <얼굴 없는 눈알들 Eyes Without a Face Series>이라 이름 붙은2016년 이후의 드로잉 등을 내놓으면서 육체적 감각 없이는 설명하기 힘든, ‘육화하는 세계’로서의 독자적인 페미니스트 회화를 구축해왔다. 넘쳐흐르는 성적 긴장과 동시에 파괴와 죽음으로 달아나는 충동, 씹고 핥고 삼키고 뱉는 ‘구강적 사디즘’으로 흥건해진 욕망, 페티시즘과 폭력적 응시가 방향 없이 난무하는 부조리와 불연속의 세계, 죽음과 쾌락의 비명 사이에 펼쳐진 카니발리즘의 퇴폐에 이르기까지 화면을 터뜨릴 듯 장악한다. 장파의 ‘회화-하기’와 유사한 신체성과 공격성은1990년대 서구 페미니스트 미술의 계보에서 왕왕 등장하는데, 이 질척대고 들끓는 공격적 여성미술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남근주의적 정신분석학의 틀을 전복하는 멜라니 클라인의 ‘대상-관계’ 이론을 통해 해석되어왔다.

1990년대 이전까지 서구 페미니스트 미술은 신체를 구성주의적 영향권 내에서 문화적 텍스트로 이해하던 경향이 짙다. 미술사학자인 미뇽 닉슨은 1990년대 이후 여성작가들의 작업에서 신체가 매우 본질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회귀하는 흐름을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제닌 안토니, 레이첼 화이트리드, 로나 폰딕 등의 작품을 ‘대상-관계’ 이론을 통해 설명하는 닉슨의 글 「충분히 나쁜 어머니Bad Enough Mother」*는 그러한 통찰과 함께 ‘아버지라는 이름의 논리 name -of -the-father logic’라는 라캉적 이론에 기대온 루이스 부르주아의 1970년대 조각 경향들을 클라인 모델에 기초한 ‘아버지의 파괴destruction-of the- father’라는 관점에서 또한 해석한다.* 닉슨은 당대 여성미술이 라캉 이론에 기댄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의 상징계적 기표에서 ‘본질주의적 몸’이라는 개념으로 이동했다고 진단한 후, 이 경향을 (프로이트적)‘퇴행’이 아닌 (클라인적)‘배치’로써 접근한다. 클라인 이론은 오이디푸스 전 단계인 비언어적 경험과 내적 충동을 어머니-유아와의 관계에서 발견하고자 하는것이다. 유아는 자신과 처음 관계 맺는 대상인 어머니의 젖가슴을 욕망의 대상인 ‘좋은 젖가슴’과 증오와 공포의 대상인 ‘나쁜 젖가슴’으로 구분한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어머니를 하나의 ‘전체’로서 인식하기 시작하고, 클라인은 이 변화를 가리켜 “우울적 위치/배치The Depressive Position)의 시작으로 보았다. 클라인은 이 ‘위치’에서 비로소 유아가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대상과의 관계 맺기를 시작하며, 어머니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 있고, 그로 인한 상실감이나 슬픔, 그리움, 나아가 죄책감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유아는 자신의 충동과 환상에 의해 위협받는 내적 대상을 실재로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닉슨은 이러한 클라인적 모델을 통해서만 마치 퇴행처럼 보이는 페미니스트 미술의 유아적 육체로의 회귀를 분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닉슨은 이 글에서 메이플소프가 찍은 1982년의 루이스 부르주아의 초상을 중요하게 언급하는데, 그 사진에서 부르주아는 털 코트를 입고, 자신의 조각 작품 <소녀>(1968)를 옆구리에 낀 채 웃고 있다. 팔로 단단히 쥐고 있는 ‘남근-인형(소녀)’의 어머니로 자신을 위치 짓는 듯한 부르주아의 웃음은 그를 ‘가부장제의 어머니’가 아니라 ‘유희적이고 공격적인 어머니’로 달리 상상하게 한다. 이를 두고 닉슨은, 부르주아가 남근과 유아를 향한 공격성의 환상을 수행performing하면서, 예술가/어머니가 어떻게 공격성을 지닌 주체로 구성될 수 있는지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장파의 2015년 작 <체셔 고양이처럼 웃기Grinning Like a Cheshire Cat>에서, 웃고 있는 여자는 부르주아의 웃음을 상기시킨다. 여자의 표정과 포즈는 일견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화면 밖을 응시하는 눈과 드러낸 이빨은 날카롭고 공격적이다. 작가는 이 ‘웃음’의 태도를 폭소나 조롱도, 두려움이나 비열함도 아닌 “쪼개기”라는 비속어를 사용해 설명하곤 한다. 장파는 실제로 이 웃음을 띠고, 이 웃음을 그린다. 앨리스 앞에서 서서히 사라져가는 체셔 고양이처럼, 몸이라는 존재가 사라진 후에조차 오래도록 남겨지는 이 이빨을 드러낸 웃음은 남근적 텍스트들을 모조리 낙후시키고자 한다. 클라인, 라캉,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모델 간의 긴장을 이용함으로써 만들어낸 유희적이며 공격적인 어머니,* “충분히 나쁜” 어머니의 웃음이 장파의 회화 표면을 채우는 질료처럼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다.

3.
2018년 두산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 선보인, 폭 5미터에 육박하는 대형 유화작업 (2017~2018)의 한켠에는 체셔 고양이처럼 실실대는 그 여자가 다시 등장했다. 여전히 이빨을 드러내고 이상한 웃음을 웃고 있다. 다른 여자들도 이빨을 한껏 드러내고 웃는다. 어떤 이빨들은 성기의 자리를 대신한다. 여자들의 눈알은 얼굴에서 달아나 나뭇가지와 뿌리, 덤불의 사이사이에 빼곡하다.“얼굴 없는 눈알들”은 ‘시각성’이라는 정언명령을 떠나, 단일한 응시의 폭력을 놀려댄다. 세잔 말년의 대작 <대수욕도>(1898~1905)의 구도를 참조한 이 작품은 짐작컨대 원근법적 시선에 도전하고 근대 아방가르드 양식의 물꼬를 튼 ‘거장’ 세잔을 향한 질투이자 패러디, 혹은 반격으로 보인다. 장파의 작업에서 여자들은 목욕을 하려고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제목이 암시하듯 폭도에 가깝다. 꿈틀대는 선, 상승하는 붓질과 함께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 잠시도 안온할 새 없이 아우성치는 물성의 움직임과 요란한 색채가 회화의 표면을 초과한다. 한없이 매끈한 평면위로 납작하게 내려앉고자 했던 세잔 회화의 표면은 장파 회화의 요동하는 운동감과 분출하는 질료들의 촉각성에 압도된다. 색채의 수선스러움이 급한 들숨을 내쉴 새 없이 낚아채면, 회화라는 고요한 보수성은 모처럼 숨가쁘게 진보한다.

세잔은 18세기 신고전주의에 심취해 <대수욕도>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연을 따라 푸생처럼 그리고 싶어 했고, 인상주의의 색채에 전성기 르네상스의 구성과 디자인을 부여하고 싶어 했다.* 당시 창궐하는 바로크와 로코코의 화려한 퇴폐미에 대한 반발로써 유럽의 미학적 열광은 신고전주의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 열광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미학자 요하임 빙켈만의 미학은 공교롭게도 서구 유럽의 인종주의적 인식론의 토대를 만들게 된다. 빙켈만은 고대 미술의 정신성과 도덕적 품성이 견인하는 숭고하고 합리적인 미학을 강조했으며, 양식사로서의 미술사를 학문적으로 정교화했지만, 빙켈만이 주장한 “서구 문명의 원류”로서의 고대 그리스문화라는 위상은 이후 백인-유럽인들을 ‘순혈의 아름다움’을 가장 완벽하게 선취한 종족으로 인식시키는 인종주의의 단초가 된다. 역사학자 염운옥이 밝히듯, “하얗게 빛나는 그리스 대리석 조각”에의 미적 판단은 백인우월주의와 인종화의 근거로 작동해온 것이다.* 염운옥은 ‘색’을 열등한 문명과 동일시하고, ‘흰색’만을 우월한 문명의 징표라고 강조해온 빙켈만의 미학적 신념을 서술함으로써 괴테의 『색채론』 등으로 이어지는, ‘색채’에 대한 서구인들의 오랜 혐오의 역사를 소환한다.* 즉 색채에 대한 공포는 ‘이종異種’에 대한 공포였고, 이때에도 여지없이 ‘현란한’ 색채는 ‘저열한 것’, 따라서 ‘여성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마찬가지로, 인종에 대한 차별 역시 ‘몸’을 둘러싼 규정과 편견에서 비롯된다. <너의 몸은 전쟁터다>(1987)라는 바바라 크루거의 전언이 여전히 메아리친다. 미국의 여성학자이자 법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특정 집단을 겨냥해 투영되는 혐오의 가장 대표적인 대상은 여성의 몸이라고 주장했다.* 여성차별적 혐오는 이러한 형태의 투영이 거의 모든 사회에서 얼마나 지속적이고 규칙적으로 나타나는지는 설명해주는 단적인 예다.* 여성의 신체는 출산을 한다는 이유로 ‘동물적 삶’과의 연속성이나 ‘몸의 유한성’ 따위의 개념을 통해 종종 설명돼왔다. 많은 문화권에서 여성은 유약하고, 끈적거리며, 유동적이고, 냄새 나는, 심지어 무언가를 유혹해 오염시키는 불결한 대상으로 상상되어 왔고, 그런 인식은 여성에 대한 혐오를 일견 정당하게 만들었다.* 그런 와중, 장파의 회화에 넘쳐나는 색채는 ‘오염물’이라는 배제의 오브제를 오히려 회화적 양식으로서 적극적으로 융해한 결과다. 장파는 이 색채의 향연을 ‘희열’이라 이름 붙이며, ‘불쾌’의 감각이 손쉽게 ‘쾌’로 승화하지 않는 상태, 즉 ‘불쾌’ 그 자체를 새롭게 미학화하려는 취미판단의 전복을 꾀한다.*

몸을 둘러싼 난제들, 인류는 왜 이토록 긴 역사를 통해 끈질기게 텅 빈 허상으로서의 이상적 몸을 비호하려고 했을까? 고귀함으로서의 인간상, 불쾌감 없는 미학, 비정상 없는 정상성이 거듭 양산하는 끝없는 배제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일까? 이상적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고결한 미술적 대리물/작품으로 규명하고자 했던 보편적 ‘미술가’와, 타자의 얼굴에 마주서고 타자의 ‘자국’을 질감하는 ‘다른/여성 미술가’가 이 거대한 화폭 위에 포개진다. 고결한 미학 위에 세잔의 붓질이 지나고, 장파의 붓질은 타자의 자국을 자꾸만 흉내 낸다. 여성은 남성 담론의 잔여물이 아니고, 타자는 ‘정상성normality’ 바깥의 오염물이 아니어야 함을 주장하기 위한 ‘페미니스트 회화 하기’는 동시에, 모든 비천하고 오염된 타자들을 형상으로, 색채로, 웃음으로 승화하는 역설을 자처한다. 이 ‘하기’에 응답하려, 나는 그의 작업 앞에 멈춰서기를 수 차례 반복했다. 종종 즐거웠고, 가끔은 뜨거웠으며, 또 가끔은 어리둥절했다. 작가는 이러한 관객의 반응을 다분히 예기하고, 이내 웃음지었을 것이다. 작가의 웃음이, 이빨을 드러낸 그 체셔 고양이같은 웃음이 “라라라” 들리는 것 같다.

라라라 나는 용서되지 않는 얼룩
얼룩 위에 곰팡이 그대 삶을 부식하는 좀벌레
라라라 나는 지워지지 않는 그대의 오점
벤젠도 미온수도 밥풀도 소용없다네*

*진수미의 시 「라라라 나는」의 첫 구절. 진수미,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 문학동네, 2005.
*장파 웹페이지 http://www.jangpa.net/
*로지카 파커・그리젤다 폴록, 이영철・목천균 역, 『여성, 미술, 이데올로기』, 시각과언어, 1995.
*로지카 파커・그리젤다 폴록, 이영철・목천균 역, 『여성, 미술, 이데올로기』, 시각과언어, 1995.
*조앤 월라치 스콧, 공임순・이화진・최영석 역, 『페미니즘 위대한 역사』, 앨피, 2017, 41쪽.
*조앤 월라치 스콧, 위의 책, 42쪽.
*김혜순, 『여자짐승아시아하기』, 문학과지성사, 2019.
*김혜순, 위의 책, 10쪽.
*김혜순, 위의 책, 15쪽.
*Mignon Nixon, “Bad Enough Mother”, OCTOBER 71, Winter 1995, pp.71~92.
*Ibid. p.75.
*한나 시걸, 이재훈 역, 『멜라니 클라인: 멜라니 클라인의 정신분석학』, 한국심리치료연구소, 1999.
*Mignon Nixon, ibid, p.85
*Mignon Nixon, ibid, p.86
*클레멘트 그린버그, 조주연 역, 『예술과 문화』, 경성대학교출판부, 2004, 65~66쪽.
*염운옥, 『낙인찍힌 몸: 흑인부터 난민까지, 인종화된 몸의 역사』, 돌베개, 2019, 49~55쪽.
*염운옥, 위의 책, 57~59쪽.
*염운옥, 위의 책, 57~59쪽.
*마사 너스바움, 조계원 역, 『혐오와 수치심: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민음사, 2015, 207쪽.
*마사 너스바움, 위의 책, 207쪽.
*마사 너스바움, 위의 책, 207~229쪽.
*장파 작가노트
*진수미, 앞의 글,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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