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파 : 숲으로의 귀환

인간의 의식과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 장파는 가장 가까운 타인(가족)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그 고통을 중심으로 자신의 주변이 반응하고, 변형되는 독특한 삶의 현상을 경험했다. 그 고통은 익숙하지 않거나 나와는 ‘다른’ 것에 대한 타인들의 미성숙하고 불편한 전반적인 사회적 시선에 의해 조성되었다. 작가는 가족과 자신 역시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인간의 본능적인 폭력성,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고통이나 상실감 등의 복잡한 감정들을 겪게 된다.

마치 밀실 속의 은밀한 집단과도 같은 가족 속에서 긴 성장기간 동안 벌어진, 그리고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일 미묘한 갈등, 고통 등의 복잡한 감정들을 장파는 2008년을 기점으로 회화나 애니메이션 작품을 통해 본격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2009년 개인전 <식물들의 밀실>에서 장파는 회화 작품들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겪어왔을 상상하기 힘든 개인의 감정적 소용돌이를 침착하고 약간은 냉소적인 시각으로 그려낸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방관자의 입장을 취했다는 죄책감으로 일종의 심리적 감옥을 형성한 듯 보이는 <식물들의 밀실>은 작가의 감춰놓은 무의식의 발현이다.

고통 수위가 높아지면 통증은 깊어진다. 하지만 좀처럼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고통은 반복되며 두려움도 반복된다. 하지만 그렇게 반복될수록 이상하게도 더 이상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장파는 이 반복되는 감정의 과정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았다. 작가는 외상성 신경증자들의 수면패턴, 즉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충격을 받은 상황이 재연되는 악몽을 반복해서 꾸는 행위에 대해 설명하면서 본인이 자주 꾸는 꿈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세계의 끝, 2011>에서 물에 잠식 당하는 장면은 악몽의 재연과 맞물려 작가의 강박증적 의식의 반복적인 패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식물들의 밀실>에서 장파는 가상의 시나리오인 듯 상황을 설정하고, 관객에게 지정된 시점과 장면을 제시한다. 작가에 의해 통제되고 선택된 장면을 바라보게 되는 관객은 작품 속의 관찰자, 즉 내부의 상황에 대한 목격자이기도 한 동시에 화면 밖의 그것이기도 하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가는 촘촘하게 구성한 시나리오 안에 관객을 가두고 마치 시선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지만 우리가 꼭 봐야만 한다고 간곡히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작품에 등장하는 식물은 현실 속에서는 외부의 자극에 주체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는 수동적 개체일 수 있지만, 화면 속에서는 그들의 입장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몸부림과 외침을 온 몸으로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빽빽하게 돋아난 풀잎 하나 하나는 날카롭게 날이 선 칼과 같고, 하나의 집합체로 뭉뚱그려 보이기 보다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체인 것 같다. 날것의 지나치게 생생한 녹색을 뿜어내며 뻣뻣하게 한껏 긴장되어 있는 녹색은 보색이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색들과 어우러져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강렬한 에너지를 표출하는 붓터치는 관객의 눈에 식물의 잎사귀 하나 하나를 또렷이 각인 시키려는 것 같다. 그 사나운 색깔들은 역설적이게도 눈을 잠시도 쉬지 못하게 만들고, 마치 폭력의 내성화가 반복되듯 시간이 지날수록 시신경을 무뎌지게 만든다. 보기를 강요하지만, 역설적으로 감각기관은 그 행위를 지속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작가는 그 강렬하고 날카로운 색과 형상의 잔상을 관객들이 작품에서 눈을 돌린 후에도 남기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는 자아의 절규와도 같았던 <식물들의 밀실>과는 달리, 신작 <Lady-X의 모험>에서는 마침내 밀실 안에 갇혀있던 식물들이 밖으로 풀려 나와 넓디 넓은 숲으로 빠져 나왔다. 작가는 인간이 아닌 나무들과 교감을 나누는 Lady-X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숲 속에 등장시킨다. 그녀가 바라보는 숲의 풍경과 나무, 나무에 대한 성적 도착, 판타지를 서사화하려 한다는 작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Lady-X의 존재는 아직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다. <식물들의 밀실>에서는 식물에 타인이 투영되었다면, <Lady-X의 모험>에서는 나무, 혹은 Lady-X 라는 가상의 인물에 여성으로서의 작가 자신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것 같다.

이제 <식물들의 밀실>에서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풀들과 공격적이고 설익었던 색깔은 <Lady-X의 모험>에서 어느덧 한 숨 누그러 들었다. 긴장감으로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이 꽉 짜인 공간의 시나리오에서도 벗어나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내 주었다. 고통의 반복과 폭력의 순환에서 그 실체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 작가는 이제 자신으로 눈을 돌리고 가상의 Lady-X를 통해 스스로를 보듬고 싶은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여전히 날카로움이 묻어나는 붓자국과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신경질적인 색채사용에서 작가의 감정적 머뭇거림이 엿보이지만, 더 이상 기존의 타자와의 의식적인 거리 두기에서는 벗어나 보다 성숙되고 은밀한 태도로 전향한 듯 보인다. Lady-X가 어디까지 모험의 수위를 감내하고 보다 흥미진진하고 입체적인 감정의 층을 보여줄지, 그리고 그 존재의 신비감을 어떻게 관객에게 풀어내어 보여줄 지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가 기대된다.

글 : 맹지영(두산갤러리 큐레이터),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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