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의 언어를 향한 충동

아데 다르마완, 장파 전 :

아데 다르마완 전 (6.28–9.13, 아트클럽 1563) , 장파 전 (8.8—8.29, TV 21 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모든 가치들이 의심에 부쳐지고 있는 시대지만, 객관적 진리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객관성’, ‘진리’라는 단어를 쓰기도 민망할 만큼, 그 개념은 오염되고 오용되어 왔지만, 달리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진리가 객관적인 한 그것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질 뿐이다. 창조적인 정신만이 발견할 수 있으므로, 발견은 창조만큼이나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사다리는 제각각이고 불완전하며 아예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유한한 토대 위에서 무한을 바라볼 줄 아는 지상 유일의 직립 존재는 각자의 불안정한 토대 위에서 사다리를 걸치려 애쓴다. 그 사다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위안이자 불안이다. 수많은 사실과 현실, 그리고 진실을 근본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진리, 그 무한한 거리에 점진적으로 도달하려는 사다리들은 서로 걸쳐지고 엮인다. 그것은 끝이 없는 과정이기에,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며 형이상학적이라고 폄하된다. 그러나 알 수 없음과 없음은 다른 것이다. 논리실증주의 같은 현대 철학의 일파는 이 불편한 것들을 아예 무의미의 영역으로 추방해 버린다.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은 점차 컴퓨터의 알고리즘으로 기계화된다.

세계 시장화라는 정치경제학적 토대를 가지는 현대사회는 코드화를 통해 모든 것을 하나의 판으로 결집시키려 함으로서, 여러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만으로 진리를 말하라고 한다. 단기적 전망에 지배되는 현대사회는 무한을 유한으로 축소하고, 과정을 고정시키고, 필연성을 우연성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많은 방법들의 공존이 아니라, 임의적 상황을 합리화하는 하나의 지배적 언어가 강요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예술가들만큼 더 강하게 거부하는 이들이 있을까. 인도네시아의 젊은 작가 아데 다르마완(Ade Darmawan)의 ‘Home_Theater’ 전과 한국 작가 장파의 ‘어제까지의 세계’ 전은 지배적인 동일성의 원리를 상대화시키는 언어를 구사하거나 예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데 다르마완은 시대착오적인 사물들을 이리저리 조합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의식과 무의식을 들춰내고, 기하학의 논리가 동원되는 장파의 전시는 독단적인 이성의 좌표축을 변경시키려 한다. 이들에게 예술은 장식이나 잉여가 아니라,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유력한 사다리 중의 하나이다. 예술사의 명작들은 종교적 직관보다는 느리지만, 과학 기술보다는 더 빠르게 진리에 접근하는 흥미로운 언어-수단-방법을 보여주곤 한다.

저자이자 큐레이터이기도 한 아데 다르마완은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인 ‘Home_Theater’에서 중산층 가정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심미적이고도 규범적 사물들을 보여준다. 소비사회를 가동시키는 수많은 물건들은 그 수명이 짧아서 불과 몇 십 년 전의 것들도 골동품처럼 보인다. 동남아시아인인 그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압축된 근대화를 겪었을 것이고, 생산되자마자 쓰레기가 되는 사물들의 퍼레이드 속에서 일련의 공통 규칙을 발견한다. 전시장은 중산층의 실내를 꾸몄을 조명이나 장식물, 액자와 트로피, 양탄자와 유리 깔린 책상으로 연출된 연극적 무대이다. 얼마 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세계가 그곳에도 있었고,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산업시대의 전형적 사물인 키치와 만나게 된다.

보다 나은 삶에 대한 달작지근하면서도 폼 나는 환상은 계급의 차이가 있는 어느 곳에서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시대적 망상처럼 급속히 낡아지는 것도 없기에 이 버려진 사물들은 이제 고고학의 대상이다. 그가 수집한 백과사전이나 트로피 같은 것들은 한 시대와 장소의 규범을 잘 드러낸다. 한국의 벼룩시장에서 수집한 사물들로 꾸며놓은 섹션은 [life plan]으로 이름 붙여졌는데, 수집된 사물들은 한 개인의 생애주기가 지배적 질서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 알려준다. 지배적 코드를 섭렵해서 사회가 정해놓은 이런저런 코스들을 순탄하게 통과한 후, 큰 양탄자가 깔릴 수 있는 집에서 지구본이 주렁주렁 달린 거대한 책상 위의 세계인이 되면 될 것이다. 작품 [life plan]의 일부로, 도려내진 액자의 배면에 붙어있는 각종 종이들의 임의적 출처는 의식의 이면을 투사한다. 작품 [Tournament]는 각종 트로피와 규범적 내용을 담은 이미지-텍스트들이 거실 벽의 인테리어처럼 모여 있다.

그것들이 낡고 두서없이 보인다는 것은 한 시대를 풍미한 심미적, 규범적 가치가 얼마나 상대적인지를 알려준다. 작품 [Permutation]는 15개의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아래에 수집된 사물들이 유리 진열대 아래 안치되어 있는데, 다른 작품에 비해 적극적인 변형이 이루어짐으로서, 풍자에서 몽상적 세계로 도약한다. 한때의 현실이 부조리한 환상으로 변모한다. 조악한 복제품들이 보여주는 사물의 질서는 두서없으면서도 어떤 방향을 향한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더 진보된 서구사회를 나름의 방식으로 추종하려는 열망이다. 브리콜라주(bricolage)의 형식으로, 한시대의 규범이자 심미적 가치의 단편으로 호출된 사물들은 단지 골동취미적 호사나 호기심을 넘어서 언어에 대한 비유로 확장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를 구시가와 신시가가 함께 있는 도시에 비유한 것처럼, 아데 다르마완이 구사하는 언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논리에 의거하여 구축된 기술적 언어가 아니라, 여러 이질적 가닥들로 엮여진다.

그것은 수학자나 논리학의 언어처럼 정제되어 있지 않으며 정합적이지 않다. 한때 누구도 이물감 없이 받아들였을 규범들은 목수(bricoleur)의 공구상자에 담긴, 여러 쓸모로 전용될 수 있는 도구들처럼 뒤섞여 있다. 그것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보편적이지 않고 임시변통적이다. 여기에서 언어는 결코 하나의 원칙으로 구조화될 수 없다. 그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성을 가진다. 이전 세계의 파편들로부터 재구성된 또 다른 세계, 수집된 오브제들이 결합해 만들어진 언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처럼 자의적이다. 다르마완이 만들어내는 사물-언어의 구조적 배열에는 기호들 자체의 법칙들로 그 체계를 구축해 나가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 지배적 규범 속에 내재된 임의성은 지금 여기의 절대시된 규범의 지배하에 있는 영혼들에게 유쾌한 거리감을 제공한다.

장파는 이 전시에서 인과율의 세계를 다룬다. 존재의 기원과 목적을 무한으로 소급하는 인과율은 세계의 중심이어야 할 주체에게 무의미와 무력감을 준다. 작가는 주체가 스스로를 규정하려는 불가능한 기획을 ‘어제까지의 세계’가 가졌던 강박관념으로 간주하고, 바깥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려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전 세계를 규정지었던 좌표적 체계를 변경하는 것이다. 어제까지의 세계를 이루었던 지배적인 좌표축은 유클리드적 기하학에 기반 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전 세계 기하학의 대표로 호출된 것은 삼각형이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과 회화에서 두드러진 삼각형 구도의 출처는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상징되는 수미산인데, 수평을 축으로 반 접으면 정확히 겹치는 대칭상은 실재와 허구의 관계를 묻는다. 애니메이션에서 먼저 사라지는 것은 실재의 세계이다. 부재는 실재보다 더 강력한 현전성을 가지므로 기존의 인과율은 부조리해 진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가 예수의 상처를 후벼 파는 부분을 금색 삼각형으로 가리는 작품 [faithful facade]에서, 뜬금없는 삼각형은 불확실성을 검증하는 기하학적 논리의 상징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에서 이상적인 도형이기도 한 삼각형은 진리 판별의 원형이 된다. 뒤러의 작품을 문서파쇄기처럼 잘라서 수직수평으로 다시 엮은 [the logic of melancholia]는 기하학으로도 세계의 비밀을 풀지 못해 멜랑콜리에 빠져있는 알레고리적 도상에 수직수평이라는 데카르트적인 좌표계를 재차 적용한다. 고대의 부활인 르네상스와 그 연장인 근대의 기하학은 질서가 아니라, 혼돈의 원인이 된다. 기울어진 촛불이나 계란 노른자 피라미드 역시 중심 좌표축을 찾기 위한 불가능한 노력의 일환이다. 중심에서 만나는 수직 수평이라는 어제까지의 좌표가 사라지면 무엇이 남을까.

작품 [boundlessness]은 단조로운 전자음악에 맞춰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불빛 바로 아래 보이는 선만을 따라 무한히 나아갈 뿐이다. 여기에는 중심은커녕, 시점도 종점도 없이 무한히 나아가는 현재의 반복적 행위만 있을 뿐이다. 작품에 호출된 기하학이나 도상들은 신뢰할만한 상징적 구조이기에 변형을 두드러지게 한다. 독립적인 자족체로 간주된 것에는 그 내부에 형식적인 자족성을 무너뜨리는 이질적 요소가 이미 존재한다. 인과율의 세계를 의문시한다함은 동질적 구조 내부의 이질적 요소를 통해 오늘의 세계에 맞는 인과율을 재구축하려는 것이다. 기원과 원리가 자리한다고 믿어졌던 중심은 텅 비어 있다. 근대세계를 구축했던 데카르트의 중심 집중적 체계는 아직도 우리의 관념과 시각구조를 결정하고 있지만, 기하학적 환원에 의해 조성된 균형은 많은 것을 배제한다. 삼각형은 갈등을 무마시키는 종합과 화해의 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정적인 조화의 우주에 속해 있지 않다. 자기 자신만을 지시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려는 체계는 다시금 전열을 정비하지만, 가장 확실한 분야로 간주되어 왔던 수학조차 ‘형식체계(formal system)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증명’(괴델)이 나왔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는 언어에서 불투명성을 거의 제거한 수학 역시 ‘어떤 공리들을 채용하든 증명될 수 없는 진리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최고의 논리학자로 꼽히는 괴델의 원리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결론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와 조응한다. 어떤 공리계로도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분명히 존재하고, 종교나 예술은 그 신비의 영역에 자리한다.

출전:  아트 인 컬쳐,  9월호, 2013